맞다. 소방서를 뜻하는 119에 “Rescue each other(서로 위험에서 구한다)”의 앞 글자를 딴 REO를 더해 119레오라는 이름을 지었다. 소방관들이 우리를 구해주듯 우리도 함께 소방관을 구하자는 취지다. 119레오는 생명을 구하는 데 사용됐던 폐방화복이나 소방 호스 등을 가방이나 카드 지갑, 팔찌 등 패션 제품으로 업사이클링(upcycling)하고 여기서 발생한 영업 이익 절반을 소방관 권리 보장을 위해 기부한다.

그렇진 않다.(웃음) 대학 시절 ‘사회적 문제를 비즈니스로 해결해 보자’는 슬로건의 동아리 활동을 하던 중 2016년 처음 관련 이슈를 접했다. 소방관들이 사비를 들여 화재 진압용 장갑을 구매한다는 뉴스가 한창 화제였던 때다. ‘사실일까?’ 하는 마음에 100명 넘는 소방관분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그런데 언론 보도와 달리 정작 장비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소방관은 없었다. 오히려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개인 차원에서 기꺼이 개별 구매하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되묻는 분도 계셨다.

당시 처음으로 고(故) 김범석 소방관 이야기를 듣게 됐다. 업무 중 혈관육종암이라는 희소 암에 걸려 2014년 세상을 떠났는데, 공무상 사망으로 인정받지 못해 유가족들이 힘겹게 소송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린 아들에게 병에 걸려 죽은 아빠가 아니라 멋진 소방관 아빠로 기억되고 싶다는 고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8년간 유해 인자에 노출되면서까지 사람 살리는 일에 앞장섰는데, 공무상 재해를 입증하는 건 오롯이 소방관 개인의 몫인 상황이었다(사망 5년 만인 2019년 고인은 공무상 사망을 인정받았다).

폐방화복으로 가방을 만들고 펀딩을 진행했다. ‘공상 불승인’이라는 불합리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시작 네 시간 만에 1차 목표를 달성할 만큼 반응도 좋았다. 제작비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수익금을 김범석 소방관 유가족에 전달하려 했는데 거절하셨다. 훨씬 더 힘든 상황에서 투병 중이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소송을 포기한 소방관들이 많으니 그들을 도와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좌절했다. 유가족 뜻대로 결국 다른 두 분께 기부했는데 두 분 모두 소송 시작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부금 얼마 전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거기서 끝낼 수도 없었다. 그동안 소방관분들을 만나 들었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사비를 털어 자그마한 전시회를 열었다. 암 투병 소방관 분들과 그 가족분들이 오셔서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셨고, 또 현장에 온 시민들도 이런 일이 있는 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사실 이때가 기부금을 전달했을 때보다 훨씬 감동적이었다.

단순 기부 프로젝트로는 전시 활동은 꿈도 못 꾸는 일이란 걸 피부로 느꼈다. 한 번이야 어떻게 사비로 충당한다 해도 그건 지속 가능한 방식이 아니다. 단체나 기업 후원에 기대고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느 순간 지원이 끊기면 활동도 멈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꾸준히 내려면 스스로가 이 일을 일회성 프로젝트가 아닌 비즈니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6년 정식으로 창업했고 지금까지 제품 판매와 전시, 강연, 토크쇼 등을 병행하고 있다.

가끔 온라인 행사에 참여하거나 라이브 방송을 켜기도 하지만, 지금은 제품 제작과 판매에 집중하고 있다.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잘 해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서다. 한편으로는 코로나19 이후 119레오를 더 많이 알릴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덕분에 부산, 울산, 광주, 전주 등 전국 백화점에서 오프라인 팝업 스토어도 열었다. 이달 26일부터는 1주일간 더현대 서울에서 직접 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우선 각 지역 소방서에서 내구연한 3년이 지난 폐방화복을 무상으로 기부받아 장애인분들이나 근로 취약계층이 모여 계신 지역 자활 센터로 보낸다. 그곳에서 다중 세탁과 분해 작업을 거쳐 원단을 확보한 뒤 경력 20년이 넘는 가방 장인의 손에서 제품으로 재탄생한다. 100퍼센트 수작업이다.

지역 소방서에서 방화복을 무상으로 가져오는데, 해당 지역 사회에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게나마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또 수거 작업은 전국 단위에서 이뤄지는데 이를 본사 한곳에서 취합하면 거기서 발생하는 물류비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수거 및 원단화 작업이 지역 거점 중심으로 이뤄지면 좋은데, 이미 인프라가 구축된 지역 자활 센터와 연계하면 효율이 극대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 해에 약 70톤가량의 방화복이 수명이 다해 버려지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기준으로 이 중에서 119레오가 약 6톤을 수거했다. 약 2000벌 정도로 전체의 채 10퍼센트가 되지 않는 셈이다. 올해는 전체 폐기량의 20퍼센트를 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어떤 제품을 만드느냐에 따라 편차가 크다. 상대적으로 큰 가방 기준으로는 방화복 한 벌당 한 개밖에 만들 수 없다. 그 외에 팔찌나 키링처럼 작은 액세서리류는 수십 개까지도 만들 수 있다. 결국 수요를 잘 파악해서 원단을 잘 안배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뜻깊은 원단을 낭비 없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화복 자체가 일회용이 아니다. 화재가 있으면 출동했다가 복귀하면 그걸 세탁해서 여러 번 입는 식이다. 즉, 세탁을 통해 오염 물질을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 또 방화복은 아라미드라는 섬유로 만들어지는데, 이 소재는 500도 이상의 불길에서 견딜 수 있다. 평균적으로 3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 100~200도를 견딜 수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일상에서 화재 현장 같은 극한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튼튼하게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회적으로 ESG가 부각하면서 기업들과 협업이 늘어난 건 맞다. 또 소방과 관련된 기업들과의 접점도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체감하기에 기업보다 소비자들의 변화가 더 큰 것 같다. 사실 이전에는 “공짜로 원단 가져다 비싸게 팔아먹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지금도 간혹 그러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러면 “진짜 모르는 소리 하네” 하고 옆에서 대신 설명해 주시는 분들이 늘고 있다. 확실히 소비자분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어려운 질문이다. 돌이켜 보면 항상 ‘지금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며 일해왔던 것 같다.(웃음) 힘든 상황에서는 롤 모델 삼는 기업을 떠올린다. 크게 두 곳이다. 제품 측면에서는 프라이탁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회사가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에서는 파타고니아를 닮고 싶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와 소통하고 부족한 부분은 다시 채워나가는 기업, 두 기업의 장점을 잘 섞어 앞으로 119레오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동의한다. 누군가는 우리의 활동을 “프라이탁 따라 한 거네”, “파타고니아 흉내 낸 거 아니야?”라고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대일수록 팀 가치와 비전을 호소하는 게 아니라, 제품의 디자인과 품질을 소구해야 한다. 비전은 우리 팀 내부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잘 견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굳이 그것만을 앞세워 외부로 표출하는 건 옳지 못한 방향이다. 우리 제품이 그저 예뻐서 혹은 튼튼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사고 싶어진다면 그런 공격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 소방관들이 방화복을 입은 건 불과 2003년부터다. 2002년 월드컵 당시만 해도 우비를 입고 불을 껐다. 우리 정도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 현황이 이렇다면 나머지 나라는 어떨까? 현재 방화복을 보급하는 나라는 스무 곳 남짓이다. 여전히 전 세계 대부분 나라에서는 방화복이 보급되지 않는다. 생명 존중이라는 관점에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절실한 상황이다. 추상적이지만 본격적인 해외 사업은 국내 소방관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는 시점에 시작할 것 같다.

창업 초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소방관들의 처우 개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암 투병 소방관 이야기에 주목한 것 역시 그분들에게 100만 원을 주는 게 맞냐 1000만 원을 주는 게 맞냐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에 앞서 업무를 하다 다치거나 목숨을 잃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단돈 얼마라도 보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물론 최근에는 공무상 상해를 인정받은 소방관분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달하는 이유는 그것이 결국 소송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즉, 소송을 통해 인정받은 판례가 늘어났을 뿐 개인이 싸우지 않으면 공무상 상해를 인정받기 힘든 현실은 전과 달라진 게 없다. 당장 몸이 아파 누워 있는 상황에서 각종 관련 서류를 준비해 법정에 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 등 선진국처럼 국가가 나서 소방관을 책임져야 한다.

2017년 표창원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위험 물질 등 발병 인자에 자주 노출되는 소방관에게 중증·희소 질병이 발생하면 이를 공무상 질병으로 추정하는 공무원연금법 개정안(故 김범석 법)을 발의했다. 하지만 본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또 지난해에는 같은 내용으로 소방관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오영환 의원이 대표 발의했지만, 여전히 국회 소위에 계류 중이다. 그동안 진전된 부분도 많지만 실제 입법까지 이뤄질 수 있도록 국민 여론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는 게 119레오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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