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alks; 내가 힐튼호텔을 떠나지 않는 이유

힐튼호텔은 지난해 12월 31일 영업을 종료했다. 여전히 그곳을 지키는 힐튼양복점 이덕노 회장을 만났다.

2023. 6. 13.

내가 힐튼호텔을 떠나지 않는 이유

힐튼양복점 이덕노 회장

기술의 발전에도 무언가 손으로 만들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장인(匠人)이라 부른다. 장인의 손길이 담기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50년 가까이 수제 양복을 만들고 있는 힐튼양복점 이덕노 회장은 장인의 틀을 깼다. 24시간 이내 납품이라는 원칙으로 수십 개 국가의 정상이 입을 양복을 만들었다. 2021년 정들었던 이태원을 떠나 힐튼호텔 2층에 새로운 터를 잡았다. 힐튼호텔은 2022년 12월 31일 영업을 종료했지만, 여전히 그곳을 지키는 이덕노 회장을 만났다. 아주 오랫동안 같은 일을 이어 오는 동력을 물었다.

50년 가까이 같은 일을 하는 동력이 궁금하다.

옷만 잘 만든다고 명장이 아니다. 양복을 만들지만,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주로 유명인이었다. 치수를 재고 대화를 나누며 그들이 유명한 이유를 늘 찾으려 했다. 남의 장점을 가져오는 것은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그들의 장점을 빨리 내 것으로 만들었다. 사람을 쉽사리 판단하지 않고 무엇이든 배우려 했다. 유명세와 상관없이 그간 만난 모든 고객을 귀빈으로 대접했다. 모든 사람이 귀빈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 그것을 동력 삼고 있다.

지치거나 매너리즘에 빠진 적은 없었나.

늘 나만의 아이디어를 찾기에 바빴다. 옷에도 녹여 내려 했다. 카라를 겹쳐서 단추를 채우는 것을 좋아하는데, 더불어 같이 잘사는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반지와 벨트 버클에도 일 년 열두 달을 의미하는 12개 보석, 가장 완벽한 숫자 9(아홉수) 등을 새겼다. 해외 귀빈들에게 이런 의미를 설명하면 흥미를 갖는다. 의복과 관련된 한국적인 이야기를 전하며 스스로 민간외교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일 년에 두 번 쉬며 힐튼양복점을 운영했어도 힘들지 않았다.

패션은 장인의 영역인 동시에 트렌드의 영역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흐름을 놓치지 않는 비결은 무엇인가.

빠른 세상 속에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오래됐다고 다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흐름보다 고객이 지나온 삶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다시 말해, 고객의 습관 말이다. 한 손을 자주 쓰는 사람은 한쪽 어깨가 낮다. 운동을 많이 하는 사람은 허벅지 앞 근육이 발달해 있다. 사람이 쌓아 온 견고한 삶의 흔적을 옷에 반영하려 노력했다. 나만의 흐름을 놓지 않았기에 세상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최근에는 고객의 평균 연령이 낮아지면서 젊은 세대의 취향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힐튼양복점에 붙어 있는 기념사진들

팝스타 마이클 잭슨,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 NBA 농구황제 매직 존슨의 양복을 만들었다고. 어떻게 유명인들의 양복 제작을 도맡을 수 있었나.

시작은 미8군 미2사단 사이의 입소문이었다. 1978년 이태원에 자리를 잡고 난 후 평택, 동두천에서도 옷 주문이 쇄도했다. 관광객들도 찾아오고 그러다 해외 귀빈들까지 찾아 왔다. 국가 정상들도 만찬 내내 외교에 관한 대화만 나누지 않는다. 그럴 때 옷만큼 좋은 스몰 토크 주제도 없다. 한 곳에서 열심히 하다 보니 전 세계의 다양한 고객을 만나게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관련한 인물들이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기억난다. 서울이 결정될 때 “서울, 코리아!”를 호명한 인물이다. 꾸준히 운동한 몸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금메달 4관왕을 기록한 육상선수 칼 루이스는, 매일 아침 운동하고 샤워한 후 옷을 주문하고 기자 인터뷰에 나섰다. 자신의 루틴을 만들고 오랜 시간 유지해 온 사람들에게 많이 배우는 편이다.

한 사람만을 위한 양복을 만드는 일이다. 특별히 신경 쓰는 점이 있는지.

여러 국가의 고객을 만났다. 아프리카, 남미, 북미, 유럽 별 취향을 구분했다. 체형, 피부색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사는 지역의 계절적 특성까지 고려했다. 더운 나라에서 온 고객은 땀을 많이 흘릴 것을 대비해 겨드랑이 부분에 땀받이를 덧대 이중삼중으로 꿰맨다. 추운 나라 순방 다닐 것을 대비해 여벌의 두꺼운 양복을 추천하기도 했다. 고객도 몰랐던 니즈를 파악하고, 이 모든 것을 반영한 맞춤 양복을 24시간 안에 공급하는 것이 포인트다.

보통 수제 양복 제작 기간은 3개월이 넘는데.

길게는 1년도 걸린다. 그게 수제 명품 양복 시장의 페인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귀빈들의 방한 일정은 짧고, 경호 문제로 가게에 방문할 때 여러 문제가 많다. 국가 정상급 귀빈의 경우, 일정에 맞춰 호텔로 가서 미리 대기했다. 도착하자마자 치수를 재고 체형과 취향을 직업, 지위 등을 파악했다. 가능한 모국어로 소통하기 위해 잠을 세 시간으로 줄여 가며 각국의 언어를 공부했다. 최대한 빠르게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2~3시간 만에 가봉하고, 다음 날 완전 수제품을 납품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고객들도 처음엔 믿지 않았다. 재단과 재봉 과정을 세분화해 가능한 인력을 모두 동원했다. 자켓은 소매, 앞판, 뒤판, 카라 등을 나누고 하의도 왼쪽, 오른쪽을 모두 나눠서 제조했다. 각 부분 기술자들을 모아 동시에 진행했다. 정성은 기본, 빨리 만드는 것도 명장의 자질이라 생각한다.

장인이라 하면 오랜 시간을 들이는 모습이 떠오르는데.

1987년 비르힐리오 바르코 콜롬비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급성복막염으로 응급 수술을 받았다. 우리나라 대통령 접견을 앞두고 양복이 빠르게 필요한 일이 있었다. 복대를 한 모습을 눈으로만 관찰해 저녁 7시 반에 치수를 재고, 다음 날 아침 6시 반에 완성품을 가지고 갔다. 대통령이 매우 만족해 하며 내가 추천하는 현대자동차를 콜롬비아로 수입해 가기도 했다. 시간은 중요치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고객의 만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장인이다.

양복 제작 과정을 설명하는 이덕노 회장

어떻게 양복과 연을 맺게 됐나.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에서 자랐다. 모두 합치면 스물세 채 정도의 집이 있는 시골이었다. 동네 가까이 미군이 파견 나와 있었다. 소죽을 끓이고 난 불에 감자, 고구마 같은 것들을 구워다 밤늦게 근무하는 미군들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그렇게 연을 맺을 한 미군의 발령을 따라 유학차 서울로 상경했다. 미군 부대에서 미국 신문 배달도 하고 태권도도 알려주면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졸업하고 PX 북스토어에서 일을 하다가 잡지들을 접하게 됐다.

그중 패션 잡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가.

지큐(GQ), 에스콰이어(Esquire)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무엇이 유행하는지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최고의 옷을 입어 봐야겠다고. 잡지를 찢어서 들고 다니며 ‘이대로 옷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것이 맞춤옷의 시작이었다. 또 목공소에 부탁해 15센티미터 나무 굽으로 된 구두를 맞추기도 했다. 나만이 입을 수 있는 독특한 옷이 좋았다.

이태원에는 어떻게 자리 잡게 됐나.

당시 이태원에 양복점이 11개 정도 있었는데, 모두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주문이 밀려 있었다. 좋아하는 옷도 입고 돈도 벌고자 영업직으로 일을 배웠다. 그리고 1978년도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힐튼양복점을 열었다. 그렇게 50년 가까이 흘렸는데, 이태원을 지나는 젊은 사람들의 옷을 구경하는 것이 좋았고, 자극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많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웃음)

이태원의 변화도 모두 지켜봤겠다.

제대 이후의 삶을 그곳에서 보냈다. 모든 순간이 좋지는 않았다.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젊은 사람도 많아졌다. 활기찬 것은 좋았으나 불법 증축도 많아졌다. 화재가 있거나 물난리가 나면 피할 곳이 없겠다는 생각에 10년 전부터 여기저기 민원을 넣으러 다니기도 했다. 기회가 있으면 여러 행사에 참석해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사랑하는 공간이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코로나19를 맞았다. 이런저런 이유가 겹치면서 삶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이태원을 떠날 결심을 했다. 이후 10·29 이태원 참사가 있었고, 매일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찾아가서 울었다. 잘못된 관습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어떻게 힐튼호텔에 자리하게 됐나.

처음에는 힐튼(hilton)이라는 상호 때문에 힐튼호텔과 소송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단골손님들이 힐튼호텔 회장과 자리를 만들어 줬고, 국내에서만 영업을 하는 조건으로 고소를 취하했다. 이후 내 오랜 단골고객이 되기도 했다. 기회가 되면 힐튼호텔로 오라는 말을 했었는데 잊고 있다가 생각났다. 그렇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생각으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2022년 12월 31일, 힐튼호텔이 영업 종료를 하면서 양복점까지 문을 닫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끝까지 이곳에서 장인 정신을 유지하려 한다.

힐튼양복점 외에는 호텔 모든 곳에 불이 꺼졌다. 이 자리를 끝까지 지키려는 이유는?

떠날 이유가 없다. 임대계약서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체 주문도 줄고 영업에도 큰 타격이 있는 상황이다. 처음에는 50년 가까이 쌓아 온 게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시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상적인 계약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호텔을 새로 매입한 측에서 협의를 요구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관습이 쌓이면 안 된다.

좋아하는 일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나.

익숙해지면 바꾸고 오래되면 헐어버리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무언가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귀하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은 새로움에서 오지 않는다. 내가 가진 것, 남이 가진 것을 두루 살피고, 그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온다. 오랜 시간 더불어 살고자 하는 그 귀한 마음을 유지하길 바란다.

글 정원진 에디터